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J. R. R. 톨킨 (문단 편집) === 종교 === >"반지의 제왕'은 물론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고 가톨릭적인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랬지만, 개정에서는 의식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종교'와 같은 상상의 세계에서의 컬트나 관습에 대한 어떤 언급도 넣지 않았거나, 실질적으로 모든 언급을 배제한 이유입니다. 종교적인 요소가 이야기와 상징에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 >J. R. R. 톨킨[[http://movies2.nytimes.com/books/01/02/11/specials/tolkien-letters.html|#]][* 1953년 12월 2일, 톨킨은 그의 친구 로버트 머레이(Robert Murray) [[예수회]] 신부에게 상당히 짧은 다섯 단락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그의 모든 편지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편지가 되었다. 머레이 신부는 ‘반지의 제왕’의 일부를 읽고 논평했으며, 그 글로 인해 “은혜의 질서와 긍정적인 양립성”에 대한 강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The Letters of J.R.R. Tolkien, 171-72).[[https://www.tgckorea.org/articles/1474?sca=%EC%98%88%EC%88%A0%EA%B3%BC+%EB%AC%B8%ED%99%94|#]]]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내[* 아내는 성공회 신자]가 될 사람에게 가톨릭으로의 회심을 강권했을 만큼 가톨릭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톨킨에게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어머니가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그래서 톨킨 역시 8살 나이에 가톨릭교회에 입교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후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의지하고, 영국 성공회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 버밍엄 빈민가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앙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여동생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된다.[* 가톨릭교회 입교는 톨킨의 어머니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전환점이 되고, 한편으론 인생의 시련과 고통의 시작이 된다. 왜냐하면 성공회 교인이었던 친정 가족가 이웃들이 이런 결정에 매우 분개하여, 그녀를 여러 방법으로 회유 및 협박하였기 때문이다. 갖가지 정신적인 압력 뿐만 아니라 끝내는 일체의 재정적 지원과 도움을 끊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결심을 굳건히 지켰고, 자식들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라나도록 애를 썼다.] 톨킨의 가족은 톨킨이 상급학교에 지원, 합격하였을 때, 사랑하던 시골의 집을 떠나 산업화로 복잡하고 부산스러웠던 대도시 버밍엄으로 이주해야 했고 매일매일, 등교하기 위한 교통비를 댈 수가 없었다. 싼 집세의 집을 찾아 여러 번 이사해야 했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에드베이스턴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러나 이곳 근처에는 성인 [[존 헨리 뉴먼]]이 세운 영국 오라토리오회의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 있는 신부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를 알게 됐다. 생활고와 집안에서 고립되고 냉대받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자녀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점점 지병인 당뇨병이 심해졌고 프랜시스 신부[*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읜 톨킨과 동생은 그의 어머니가 임종하면서 후견인으로 지정한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로부터 큰 영향과 도움을 받았는데, 신부의 존재는 그야말로 어머니를 잃은 큰 슬픔을 딛고 톨킨 형제가 잘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부는 고아가 된 후 친척들의 냉담한 반응에 처했던 톨킨 형제에게 사비를 들여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규율 있는 모습으로 형제들에게 신앙과 삶의 모범을 보여 줌과 동시에 자신이 소속된 오라토리오회에 관한 정보와 해당 공동체의 설립자이자 [[수호성인]]인 [[필리포 네리]]의 일생과 교훈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이로 인해 톨킨은 훗날 [[견진성사]]를 받을 때 자신의 견진명으로 필리포 네리의 이름([[영어]]로는 [[필립]])을 택했으며, 가끔씩 자신의 이름을 존 로널드 필립 루엘로 쓰기도 했다. 또한 톨킨은 아들 마이클에게 쓴 편지에서 프랜시스 신부에 대해서 “진짜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와 같은 후견인이었다”고 묘사했다.]도움으로 잠시 시골집에서 요양할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1904년 11월 초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 후 불과 서른네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녀는 브롬즈그로브에 있는 가톨릭교회 묘지에 영면하였고, 유언장에서 프랜시스 신부를 후견인으로 부탁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평생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게 머물렀던 톨킨은 어머니의 죽음을 일종의 신앙을 위한 ‘순교’로 이해했고, 평생 어머니의 신앙으로 자신이 신앙을 지킬 힘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의 손자 사이먼 톨킨에 의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실시 된 전례 개혁과 변화들에 할아버지가 실망했다고 전했다. 신앙심도 그렇지만 본인이 언어교수라 라틴어에 애착이 간 것도 있을듯하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나는 본머스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간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교회가 [[미사]]식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꾼 직후였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분명히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나머지 신도들이 영어로 대답하는 동안 라틴어로 아주 크게 모든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톨릭용 성경 역본인 Jerusalem Bible 편찬[* 직접 번역했다기보다는 윤문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에도 참여했고 실제로 가톨릭용 성경 중 Jerusalem Bible이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데 아무래도 문학작가인 톨킨의 기여 때문인 듯하다. 장남인 존 프랜시스 루엘 톨킨은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